정병 (동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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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병은 후한 말 ~ 삼국 시대 동오의 유학자이다. 정현의 제자로서 교주로 피란하여 유희와 함께 오경에 통달했고, 사섭에게 장사로 등용되었다. 손권에게 태자태부로 초빙되어 손등의 혼례를 주관했으며, 진수는 그를 엄준, 감택과 함께 당대의 학자로 평가했다. 저서로는 《주역적》, 《상서박》, 《논어필》 등이 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에게 항복을 주장하거나 유비에게 사자로 파견되는 인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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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 (동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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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정병 |
본관 | 불명 |
자 | 덕추(德樞) |
출생지 | 양성(襄城) |
사망지 | 미상 |
관직 | |
섬긴 세력 | 손권 |
주요 관직 | 오군도독(吳郡都督) 태자태부(太子太傅) |
저서 | |
가계 | |
부모 | 미상 |
배우자 | 미상 |
자녀 | 미상 |
2. 생애
정현에게서 학문을 배웠다.[7] 이후 난을 피해 교주로 피난하여, 유희와 함께 경전의 대의를 논하며 오경에 통달하게 되었다.[7] 교지 태수 사섭에게서 장사로 등용되었다.[7]
《주역적(周易摘)》, 《상서박(尚書駮)》, 《논어필(論語弼)》 등 3만여 말의 저서를 남겼다.[7][3]
진수는 엄준, 감택과 함께 정병을 한 시대의 유자로 평가했다. 정병은 정현에게 학문을 배웠고, 난을 피해 교주의 사섭에게 의탁했다. 교지에서 유희와 함께 학식을 쌓아 오경에 통달하게 되었고, 사섭으로부터 장사에 임명되었다.
손권은 정병이 이름 높은 유학자라는 소문을 듣고 예를 갖추어 초빙하여 태자태부로 삼았다.[7] 황무 4년(225년), 손권이 선태자의 아내로 주유의 딸을 맞이하면서 정병에게 태상을 맡아 오군에서 태자비를 데려오게 하였다. 손권은 친히 정병의 배에 탔다.[7] 정병은 돌아온 후 선태자에게 조용히 혼인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규방에서도 예의와 교화를 존숭하기를 권했으며, 선태자는 이를 좋게 여겼다.[7] 재직 중에 병으로 죽었다.[7]
정병은 《삼국지》에 열전이 수록된 인물들 중, 자신의 열전을 제외한 어떤 곳에도 기록이 없는 유일한 인물이다.[8] 진수는 "엄준, 감택과 더불어 일대의 학자였다"고 평했다.
정병은 평생 동안 《주역》에서 발췌한 《주역적(周易摘)》, 《상서》에 대한 논의를 담은 《상서박(尚書駮)》, 그리고 《논어》를 안내하는 《논어필(論語弼)》 등 세 가지 주요 저작을 남겼다.[3]
3. 저술
4. 평가
이후 학자로서 명성을 얻어 손권의 초빙을 받아 막료가 되었고, 태자 손등의 교육 담당인 태자태부를 맡았다. 225년(황무 4년), 손등의 혼례 때에는 태상이 되어 손등의 비 (주비)를 맞이하는 역할을 맡았다. 손권과 손등에게 정중한 대우를 받았으며, 병으로 인해 재관으로 있던 중 사망했다.
정병은 『주역적』, 『상서박』, 『논어필』 등 3만 자가 넘는 저서를 남겼다. 진수는 "엄준, 감택과 더불어 일대의 학자였다"고 평가했다.
4. 1.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손권이 오나라의 국주가 되어 모은 현인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적벽대전 때에는 조조에게 항복할 것을 주장하고, 제갈량과 논전을 벌였으나 허무하게 패한다. 그 후, 유비가 관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나라를 공격해 왔을 때, 손권의 사자로 파견되어 장비를 암살한 장달 등의 신병을 유비에게 넘겨주지만, 유비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없어 제안을 일축당하고, 간신히 목숨을 건져 오나라로 도망쳐 돌아간다.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53
[2]
서적
Sanguozhi vol. 53
[3]
서적
Sanguozhi vol. 53
[4]
문서
徴崇も率更令に任じられている
[5]
서적
三国志
[6]
문서
몰년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이해에 감택이 태자태부가 되었으므로 그 전에는 죽었을 것이다.
[7]
서적
삼국지
[8]
서적
정사삼국지군웅명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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